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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ing Jouney

​봄의 여정

 

 

우리가 어딘가로 떠날때 주로 쓰는 여행, Travel이라는 단어와는 달리
긴 여정을 뜻하는 Journey는 여행과는 다른 조금 더 무거운 의미를 담고 있다.
Travel은 반드시 돌아올 곳이 있고, 돌아와야만 하는 비교적 짧고 일시적인 방랑이라면, 
Joruney는 돌아올 계획을 세우지 않는 긴 여정'을 뜻하는 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의 삶은 여행이라기 보다는 돌아올 수 없는 긴 여정위에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그 오랜 여정의 길 위에서 우리는 세상이 이야기하는 수많은 목소리에 휩쓸려 정해진 길을 벗어나 길을 잃는 것을 점차 두려워 하게 되는 것 같다. 정주定住사회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일탈로 치부하곤 하지만, 오히려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수많은 길들 위에서 떠돌 때 우리의 여정은 조금 더 멋지고 특별한 추억들로 채워지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작품 속 도도새들은 단지 '스스로 날기를 포기하는 바람에 멸종된 비극적인 어떤 한 종種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와 가능성을 가지고 우리의 긴 여정에 작은 화두를 제안하는 존재로서 작품 속에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건넨다. 

봄은 우리에게 늘 무언가를 시작하는 기분을 들게 한다. 바야흐로 여정을 시작하거나, 긴 여정에 앞서 몸과 마음을 준비하기 좋은 시기다. 우리는 이미 삶이라는 긴 여정길 위에 있지만, 때로는 잠시 멈추어 서서 추위를 뚫고 꽃이 피는 몽우리를 가만히 지켜보며 걸어온 길을 복기하고, 가야 할 길을 생각해 보는 일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고 지난한 여정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매번 찾아오는 봄이지만 그 봄이 매번 다르게 느껴지듯, 이렇게 다시 찾아온 또 다른 봄과 함께 당신의 여정 위에 멋진 일들이 꽃처럼 만개하길.  
  

 

우화(羽化)를 꿈꾸는 우화(寓話)

 

 

김선우 작가는 도도새(Dodo Bird)를 의인화하여 경쾌하고 아름다운 화면을 구축하면서 일약 주목 받는 신진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김선우 작가의 고유한 세계를 팝아트라는 유악(帷幄) 아래 배치하려고 한다. 작가가 구축한 화면의 발랄하고 경쾌한 아름다움과 작가가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섭렵할 수 있던 세대였기에 그렇게 오해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선우 작가는 팝아트 작가가 아니다. 비유하자면 경쾌한 리듬의 현대 대중음악으로 가장 묵직한 울림과 여운을 주는 음악가처럼, 작가 또한 경쾌한 화면으로 여러 가지 성찰을 제공해주는 현대 미술가이다. 그의 작업은 철학적이며 사색으로 충만하다.

 

김선우 작가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2017년 이후이지만 2014년의 주옥과 같은 드로잉에서 그가 세웠던 철학의 얼개가 대략 완비된다. 소위 ‘새(鳥)상’이라는 말로 세상(世上)의 본질을 묻는 게임을 시작한 것이다. 새들에게 국경이나 지역의 한계는 없다. 물론 그들은 섭생과 온도 등 삶의 조건을 위해서 철마다 이동하기도 한다. 사람들도 원래 이-주(移-住)를 번갈아하면서 삶을 꾸려왔다. 정주(定住)라는 삶의 형식은 농경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전에는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았다. 수렵ㆍ채집의 사회에서는 소규모 공동체가 각자의 자유와 규율의 변증 속에서 원만구족하게 살았다. 노자(老子)가 상정했던 소국과민(小國寡民)이라는 이상적 개념도 그 시절에 대한 향수의 반영물일 것이다. 정주가 시작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즉 예약형정(禮樂刑政)이 복잡해진다. 정주가 시작되면 시간을 계산해야 한다. 때를 알아야 파종하고 수확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과 자연 사이의 관계, 즉 천인지제(天人之際)의 개념도 발달하게 된다. 이 두 가지가 복잡하게 착종(錯綜)되면서 문화가 되고 제도가 생기고 나아가 제약마저도 고개를 들었다. 여기에 근대기로 진입하면서 도구적 이성이 등장하게 되면 모든 것이 모던화가 되고 급기야 신(神)마저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김선우 작가가 그리는 세계는 유토피아도 아니고 디스토피아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조건(한나 아렌트)과 인간의 굴레(섬머셋 모옴)에 대한 작가의 내밀한 반응이다.

 

김선우 작가가 처음부터 도도새를 그린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모든 새를 의인화했다. 독수리ㆍ부엉이ㆍ올빼미ㆍ갈매기ㆍ펠리컨 등 온갖 새들이 제복을 입고 교육을 받으며 오욕칠정(五慾七情)의 생동감 넘치는 표정을 발산시켰다. 아마도 작가가 우리에게 도도새의 스토리를 설파하며 각종 프로젝트를 기획했던 때는 2015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도도새의 신화를 듣고, 인간의 모습 또한 그것과 같다고 무릎을 쳤을 것이다. 그들은 여행을 하고 오로라를 감상하며 낚시를 하고 모닥불에 둘러싸여 캠핑을 한다. 수많은 풍선이 오두막을 싣고 비행을 해도, 붉은 경비행기를 몰아서 대서양을 가르더라도, 그들은 본연을 잃고 있다. 그 본연은 자신들이 원래 날았다는, 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도도새가 우리를 가리키는 상징의 체계라고 볼 때, 우리도 무언가 잃어버린 본연이 있을 것이다. 김선우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 무언가의 본연이다.

 

철학적 사유에 매진하는 작가들은 형상예술이 갖는 지시적 성격(denotative)과 명확한 시각성(univocality) 때문에 형상적 예술가들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형상적 예술을 견지하는 예술가들은 철학적 사유에 경도된 예술가들이 갖는 작품들의 함축적(connotative)이고 또 솔직하지 못한 그 애매한 시각성(equivocality)을 경멸하곤 한다. 그러나 가슴(heart)은 이성(reason)으로는 알 수 없는 제 3의 이성을 갖고 있다. 또 이성은 가슴이 무시하는 가슴을 갖고 있다. 김선우 작가의 작품은 가슴과 이성이 함께 손을 잡아 완성시킨 세계이다. 명확한 시각성을 갖추었으나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며 그 어떠한 회화보다도 철학적 기반에서 구축된 사유체계이다.

 

나는 김선우 작가의 놀라운 회화 세계를 보면 마샬 살린스(Marshall Sahlins)의 고고학적 추론과 열역학 제 2법칙의 우주관, 그리고 시대가 흐를수록 더욱 가열(苛烈)하게 치달아왔던 역사가 생각난다. 그리고 지금 여기를 사는 인간군이 떠오른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농경과 정착을 이룬 신석기를 풍요의 혁명이라 일컫는다. 살린스는 이것이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구석기의 수렵ㆍ채집 사회의 삶속에는 경쟁 없이 협력만 있던 행복의 시대였다고 한다. 열역학 제 2법칙은 시간이 흐르면서 우주의 에너지는 식게 되며 따라서 우리 역시 열사(heat death)로 가는 과정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이 법칙은 기술이 발전한다는 것은 엔트로피(혼돈)가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법칙은 어제보다 오늘이 나은 것이 아니라 엔트로피가 적었던 과거가 오히려 좋을 수도 있다고 본다.

 

김선우 작가는 위에서 간단히 말한 논의들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화면을 구축해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향유하여 감각대상(aistheton)에 대한 만족에 머물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깊이를 발견하도록 안내받게 된다. 하나, 자연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셋,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이 문제의 트라이앵글은 절대로 풀릴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작가의 세계 속에 몰입되면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 앞으로 작가가 인도하는 흡인력은 더욱 강해질 것이고 문제에 대한 포커스는 더욱 정밀해질 것이다.

 

이진명, 前 대구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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