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月刊 드로잉
2025년 7월부터 12월까지, 월간月刊 드로잉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그간 오랫동안 여러 다양한 작업을 함께 진행해 왔던 프린트베이커리에 제안을 드려 성사되었습니다 :)
매월 말, 프린트베이커리 홈페이지에서 래플 형식으로 구매권을 추첨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며, 자세한 사항은 저의 인스타그램 및
프린트베이커리를 통해 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어요. (웹사이트 https://www.printbakery.com/rapple.html)
드로잉과 함께 저의 편지를 받아보실 수 있으며, 이미지와 편지 내용은 이곳에 아카이빙 됩니다.
Prologue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올해의 절반이 지나갔습니다. 이번 드로잉 프로젝트는 그런 아쉬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일기를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손쓸 틈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잡아두려는 애틋한 마음에서 비롯하듯,
그러한 마음을 담은 한 달을 그려보고,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매달 단 한 점의 드로잉과, 한 통의 편지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아쉬움은 혼자서 마음에만 담아두기 보다,
표현해야만 비로소 애틋하며 소중하니까요. 시간이라는 거센 물결 앞에서는 우리는 모두 평등하기에,
이 유한한 애상을 함께 나누는 일이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작은 위로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7月

여름의 마음 A heart shaped by summer, gouache on paper, 42 × 30 cm, 2025
7월의 서간書簡
안녕하세요, 김선우 작가입니다.
무더운 날씨, 건강히 지내시는지 안부를 먼저 여쭙니다.
정말 오래간만에 소식을 전해드리는 것 같습니다.
작업에 열중을 하다 보면,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에 몹시 공감하게 되곤 합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계절이 변해 있고,
스스로를 비롯해 주변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저는 늘 마음 한 켠에 미안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책임질 일들이 많아서,
분주하다는 이유로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내가 미처 마음을 충분히 나누어 주지 못한 가족, 연인, 친구들, 고양이, 식물들에게요.
물론, 사람마다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한계가 있고, 먼저 해결해야 할 일들의 우선순위를 정해
그 에너지를 잘 분배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때로는 결코 그 모든 일을 다 잘 할 수 없는 스스로의 능력의 한계가 아쉽게 느껴져 자신을 자책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그리고 저 스스로에게 미안한 그 마음을, 고마운 그 마음을,
안부를 전하는 이 편지를 핑계삼아 조심스레 꺼내어 놓아봅니다.
분주한 모든 일들을 훌훌 털어버리고서 푸른빛이 일렁이는 여름의 바다를 우리가 함께 바라보는 상상을 합니다.
수평선 저편에서 불어온 소금기 머금은 바람이 우리의 땀방울을 씻어주고,
수면 위에서 무수히 부서지는 찬란한 윤슬이 우리의 눈꺼풀을 간지럽힙니다.
그 안온하고 그리운 풍경의 안부를 당신에게 전해봅니다.
2025. 7.
8月

계절의 정원사Seasons’ gardener, ink and watercolor on paper, 42 × 30 cm, 2025
8월의 서간書簡
안녕하세요, 김선우 작가입니다.
뜨거운 여름, 8월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간을 전하며 저도 저 스스로에게 안부를 묻게 됩니다.
이 계절을 잘 지나보내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지.
며칠 전 지인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의 정오 즈음이었고, 그렇게 길을 걷던 중 문득 그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뜨겁고 견디기 힘든 여름이어도, 앞으로 살면서 한 오륙십 번 정도만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좀 숙연해져요.”
그의 말대로, 만일 제가 앞으로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한다면 이제 제가 경험하게 될 여름은 고작 43번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매년 계절을 견뎌나가다 보면 우리는 종종 지루함을 느끼게 되곤 하는 걸까요?
여름의 더위는 길게만 느껴지고, 겨울의 추위는 여름의 더위를 순식간에 망각하게 할 만큼 혹독히 차갑기만 합니다.
그러나 문득 지인의 말을 떠올려 보니, 그러한 계절의 혹독함들이 되려 감사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마주하게 될 앞으로의 계절들은 생각보다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더위와 추위는 우리가 보내는 그 얼마 안 되는 귀한 계절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며,
그리하여 그 계절들 동안 우리가 지나보낸 것들, 그리고 맞이할 것들에 대한 기대와 회한을 선사하니까요.
저만의 작은 정원을 갖게 된 지 올해로 2년째가 되었습니다. 노지에서 월동하는 식물들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작년에 심은 수국들이 겨울을 버텨내지 못하고 죽은 줄로만 알고 낙담했습니다.
그러나 봄이 되니 앙상하게 마른 가지에서 연둣빛 새싹이 빼꼼 뻗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알아보니 수국은 추운 겨울을 충분히 견디며 꽃눈을 만들고, 여름이 되면 마침내 꽃을 피워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기특하게 겨울을 견뎌준 덕분에 올해 여름에는 파랗게 함박 피어난 예쁜 수국들을 정원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작업실에서는 그림을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작은 정원의 서툰 정원사가 된 덕분에
저는 예전보다 조금 더 분주해지기는 했습니다만, 덕분에 예전보다 조금 더 밀도 있게 계절을 느끼고,
조금 더 참을성 있게 계절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살아가면서 앞으로 단 몇십 번 정도밖에 만나게 되지 못할 이 계절들을
조금 더 느리게, 소중하며 애틋하게 느끼게 해 주는 고마운 정원입니다.
이 길고 더운 여름이, 앞으로 다가올 길고 추운 겨울이 기다려지는 이유입니다.
2025. 8.
9月

파도를 생각하며 In Thought of the Wave, ink and watercolor on paper, 42 × 30 cm, 2025
9월의 서간書簡
독서를 좋아하는 제게 가장 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무척 고민이 많이 되겠지만,
지금 생각나는 책은 이어령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입니다. 선생님의 책을 읽다 보면,
세월에 침식되지 않고 돌탑을 하나 하나 공들여 쌓듯 지혜롭게 삶을 쌓아가는 사람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삶을 살아간다는 일이 전혀 가본 적 없는 망망대해의 바다를 항해하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잔잔하며 평온한 날들보다는 크고 작은 파도와 폭풍우를 헤치고 나아가는 나날들이 더 잦기 마련이고,
그러는 동안 어딘지 모를 곳으로 표류하기도 하며, 나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 얼만큼 와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11년째 작가생활을 지속해오는 저 또한 매 순간 이런 종류의 불안을 자주 느낍니다.
‘내 작업은 나아지는가? 이렇게 지속하는 게 맞나?’와 같은 의문을 매일 작업실 문을 열고 닫으며 스스로에게 던져보곤 합니다.
그래서 저보다 먼저 먼 바다를 항해해본 이들의 경험으로부터 말미암은 금언은 작고도 확실한 위로로 다가옵니다.
저도 그런 단단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기꺼이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있는 깊은 사람이 되어갈 수 있기를,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바다에 일어나는 파도를 보게. 파도는 아무리 높게 일어나도 항상 수평으로 돌아가지.
아무리 거세도 바다에는 수평이라는 게 있어. 항상 움직이기에 바다는 한 번도 그 수평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다네.
하지만 파도는 돌아가야 할 수면이 분명 존재해. 나의 죽음도 같은 거야.
끝없이 움직이는 파도였으나, 모두가 평등한 수평으로 돌아간다네.
본 적은 없으나 내 안에 분명히 있어. 내가 돌아갈 곳이니까. 촛불도 마찬가지야. 촛불이 수직으로 타는 걸 본 적이 있나?
없어. 항상 좌우로 흔들려. 파도가 늘 움직이듯 촛불도 흔들린다네. 왜 흔들리겠나?
중심으로 돌아 가기 위해서야. 나무들이 흔들리는 것도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네.
바람이 없는 날에도 수직의 중심으로 가기 위해 파동을 만들지. 그게 살아 있는 것들의 힘이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이어령 저, 열림원
2025. 9.
사이의 안부 A Note Left in the In-Between, ink and watercolor on tracing paper, 42×29.5cm, 2025

10월의 서간書簡
바이닐 레코드를 모은 지 어느덧 일 년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손끝 조작 몇 번이면 어디서든 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기에,
레코드를 모으는 일은 일종의 사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저는 이 느리고 수고로운 과정 속에서,
조금 더 조밀한 어떤 감각을 경험하게 됩니다. 심혈을 기울여 고른 음반을 턴테이블에 얹는 순간은 오래 고민 끝의 고백과도 같고,
매일 밤 하루를 마무리하며 음악을 듣는 그 시간은 저와 세계 사이의 숨 쉴 틈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알게 된 단어가 ‘수관기피樹冠忌避’입니다. 나무들이 서로의 수관을 침범하지 않고 자라
그 사이로 빛이 스며들며 함께 공존하는 현상이라고 하는데,
마침 제가 레코드로 즐겨 듣는 기타리스트 무네키 타카사카의 음반을 판매하던 레코드샵의 이름이 《수관기피》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절묘하게도 무네키의 음반 소개 글에는 ‘소리와 소리 사이를 소중히 하면서 연주하고 있습니다.’ 라고 적혀있었습니다.
문득 저는 도도새를 떠올렸습니다. 도도새는 포식자가 없는 환경에서 날기를 포기한 채, 안락함 속에 머물다 결국 멸종한 새입니다.
이처럼 편리함에 익숙해질수록 우리 또한 어쩌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어떤 중요한 감각을 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도새가 순응의 끝에서 사라진 존재라면, 수관기피는 서로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자리를
지켜내는 삶의 방식이며, 개인의 고유함을 보존하면서도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지혜이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제주에서의 이번 전시가 사람들에게 수관기피의 틈 사이로 스며드는 연한 빛무리와 같은 기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품을 준비했습니다. 나무들이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음으로써 만들어낸 그 무해한 빛처럼,
소리와 소리 사이를 소중히 하며 음반을 만들었다는 무네키의 말처럼, 세상과 당신의 사이,
당신과 세상의 사이가 조금 더 소중하며 안온한 관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2025.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