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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taway 
<표류기Castaway>

2023. 12. 8.(금) - 2024. 1. 2.(화)
PBG 더현대(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로 108더현대서울 2층)

지난 7월,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여름의 한 달 동안 표류하듯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일벌레 같은 지독한 성격 탓에, 사방에 온통 해야 할 일들과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넘치고 치이는 곳에서 스스로를 멀리 격리 시켜야만 무언가를 쓰고, 생각하고, 새로운 것을 그려보는 일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인천공항에서 수하물을 부치는데, 항공사 직원이 목적지 공항의 이름이 무척 낯선 듯 갸웃했습니다. 이..라..클리오? 가시는 거, 맞아요? 네 맞아요. 짐은 이라클리오 공항에서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경유지인 암스테르담에 내리기 직전, 승무원은 내게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고, 크레타라고 답하자, Holiday?라고 묻기에, 나는 일을 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해야 할 일이 진짜 진짜 많거든요. 그녀는 내 말을 듣더니, 오히려 잘 됐군요! 라며 부럽다는 표정으로 웃어주었습니다.

 

13시간을 날아 비 내리는 우중충한 암스테르담을 경유해, 다시 네 시간을 날아서 도착한 크레타의 날씨는 상상한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터미널이 단 하나 뿐인 이라클리온 니코스 카잔차키스 공항의 활주로에 내리자마자 먼 바다의 냄새와 함께 에게해를 주름잡는 아폴론의 강렬한 햇살이 반겼습니다.

 

한 달 간 머물게 될 에어비엔비의 호스트 마놀리스가 알려준 주소가 약간 정확하지가 않았던 탓에 전화로 서로의 위치를 두고 약간 실랑이를 한 끝에 결국 그가 나를 데리러 왔고, 헤르니스소스라는 동네의, 'LITTLE VILLA'라는 명패가 붙어있는 아담하고 하얀 그리스식 건물 앞에 나를 내려주었습니다. 침실과 화장실, 거실로 구성된 작은 1층짜리 집이었고, 거실에서는 유리문 밖으로 푸른빛으로 넘실거리는 크레타의 북쪽 바다가 보였습니다. 집의 구조 자체는 노원구 공릉동의 우리집 아파트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는데, 집을 둘러싼 풍경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습니다.

햇볕은 따갑도록 강했지만, 테라스로 나가는 유리문을 열자 옅은 소금기를 머금은 청량한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나의 볼을 쓰다듬었습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의 OST 중 <바다가 보이는 마을>이 어울릴 만한 풍경이었습니다.

 

헤르니스소스에서는 모두 수영복 차림으로 거리를 걷거나 스쿠터를 타고 휙휙 지나다녔습니다. 저도 작업을 하다가 지치면 그들을 따라서 수영복만 달랑 입은 채로 눈치 보지 않고 해변의 풍경 속으로 달려갔습니다. 투명하게 파란 바다와 하늘빛 사이로 무수한 윤슬의 무리가 눈부시게 가만히 반짝이는 그 풍경 속으로.

에게해의 여러 섬들에서 머물며 수백 매의 원고를 써내려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상도 아마 이런 느낌의 것이지 않았을까요. 당시의 경험을 기록한 수기인 <먼 북소리>에서 그는 그 당시의 일상에 대하여 '뭔가를 열심히 했던 하루 같기도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하루 같기도 하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도착한지 고작 이틀이 지난 어느 날, 저는 문득 상상했습니다. 비교적 가까운 미래의 어느 인터뷰에서 한쪽 다리를 꼬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표정을 짓고서, "아, 크레타는 아름다운 섬이었죠.. 제게 큰 영감을 주었고요. 아 글쎄, 글과 그림이 막힘없이 술술 나오더라니까요." 라고 이야기하는 나를요. 그러던 중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머리를 흔들며 아, 제발 그러지 말자. 적어도 이곳에 머무는 동안에는 지금을 살자. 하고 생각했습니다.

 

섬에 머무는 내내,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오 분 거리인 해변으로 터벅터벅 걸어갔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매일 밤 눈을 감는 그 순간의 풍경이 수평선과 하늘이 맞닿은 파랑의 양 면이라는 사실이, 하루의 시작과 끝에 깃든 확실한 기쁨이 될 수 있는 이 섬에서 나는 하루하루를 아쉬운 듯 소중하게, 때로는 물을 쏟아 흘려보내듯 무심히 시간을 보냈습니다.

 

에게해 위로 쏟아지는 한 낮 동안의 뜨거움이 해변을 사랑하는 이들이 가진 아폴론과 같은 열정이라면, 이른 아침 동쪽에서부터 수면 위로 천천히 드리우는 무수히 많은 별과 같은 반짝이는 윤슬의 빛은,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새벽을 떠나며 남기고 간 아쉬움의 자취처럼 보였습니다. 그 깜짝거리는 빛무리들이 마치 은하수처럼 보였던 까닭이며, 또한 내가 그들을 사랑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달의 여신 셀레네가 아폴론과 자리를 바꿔 앉는 그 찰나, 그녀의 짙은 푸른 옷깃이 바다 위로 내려앉으며 새빨간 붉은 빛을 힘겹게 발하던 짧은 양초를 덮어 끄듯 마침내 어둠이 몰려오는 적막한 시간의 농밀한 색깔과 냄새가 좋았습니다.

 

해가 뜨거워지기 전, 오전 일곱 시에 아무도 없는 해변으로 나가 잠시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아침 해와 함께 물결처럼 밀려오는 윤슬들의 반짝이는 빛무리 속에서 별처럼 유영하는 기쁨을 오롯이 혼자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기쁨들의 편린을 애써 종이 위에 잡아두어 보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림을 그린다는 일, 글을 쓴다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 동시에 지극히 애틋하고 정성스러워야만 하는 일인지를 붓을 드는 순간과 순간 마다 깨달았습니다.

 

수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수영복을 빨랫대 위에 말려놓고, 거실의 테이블에 앉아 글을 쓰다 노트북에서 잠시 눈을 떼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잘 가꾸어진 생울타리 사이에 핀 새빨간 히비스커스가 바람에 산들거리는 풍경 너머로 남포빛 바다가 끊임없이 손짓하듯 밀려왔습니다. 아니, 이 섬이 계속해서 어딘가로 표류하는 중인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배멀미가 나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매일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르는 숙소 앞의 타베르나(레스토랑)에서 평소와 같이 점심을 먹고 일어섰던 어느 날, 이제 낯이 좀 익은 주인이 나를 붙잡았습니다. 아이스크림 먹고 가. 오늘 무척 더우니까. 라며. 그 말에 우리는 서로 미소를 지었습니다. 글을 쓰는 일, 그림을 그리는 일, 그리고 살아가는 일들이란 게 대부분 한 낮의 뜨거움을 견디고 땀을 흘리는 일입니다만, 새벽과, 석양과, 누군가의 호의라는 순간의 달콤하고 쌉싸름한 찰나의 시간들이, 우리 이마에 맺힌 그 인고의 물방울들을 닦아주는 부드러운 여신의 손길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섬에서 이처럼 지냈습니다.

이러한 마음들이 당신에게 이처럼 전해지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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