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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 과정에 대한 물음>

김선우 화가의 회화세계 - 이진명, 前 대구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우리는 어째서 김선우(1988-) 화가에 열광하는가? 이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내리기는 매우 어렵다. 화가는 2015년을 기점으로 차츰 상승하다 2021년에 아주 높은 궤도에 올랐다. 화가는 올해도 어김없이 여러 점의, 심상치 않은 작품을 들고, 여러분과 이야기하려고 한다. 내가 보기에, 우리가 화가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대략 두 가지 사실에 기인하는 것 같다.

 

첫째, 화가는 쉽고 명료한 시각언어를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쉽고 명료한 시각언어는 그림 속 서사구조와 완벽한 일치를 이룬다. 그것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화면에는, 화가가 사용하는 청람(靑藍), 혹은 녹색(綠色)의 바탕에서, 검은 부리를 하며 발이 노란 흰색 도도새가 등장한다. 동아시아의 사유에서 사람들은 “하늘은 둥글며 땅은 모났다[天圓地方].”라고 인식한다. 사람의 머리는 하늘을 닮아 둥글며, 사람의 발은 땅을 닮아서 사각에 가깝다. 동시에 하늘은 검고[玄], 땅은 누르다[黃]. 우리의 도도새는 검은 부리를 하며, 노란 발을 가지고 있다. 도도새는 단순한 의인화가 아니라, 매우 고차원적 은유의 복합적 설정물이다. 청람과 녹색은 자연을 상징한다. 자연은 애초에 주어진 것이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자연은 최초의 데이터(data)이다. 데이터(data)의 어원은 다툼(datum)이다. 다툼은 있는 그대로의 것을 뜻한다. 따라서 자연 바로 그것이다. 다툼은 신성(神性)을 뜻하는 ‘데이어티(deity)’나 ‘데이스(Deus)’, 혹은 디바인(divine)과 연관된다. 신성의 변통(變通)인 악마는 ‘데우스(deuce)’나 데빌(devil)이라고 부른다. 신과 관련된 단어는 대부분은 알파벳 ‘D’와 연관되어 있다. 우리의 도도새(Dodo) 역시 알파벳 ‘D’와 연관된다. 따라서 도도새는 자연, 즉 신에게서 나왔다.

 

문제는 도도새가 다툼, 다이어티, 디바인으로부터 팍툼(factum)으로 가는데서 발생한다. 팍툼은 인위(人爲)이자 문명화이다. 우리는 공장을 뜻하는 ‘팩토리(factory)’가 팍툼에서 나왔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제조(manufacture)’ 역시 같은 어족이다. 도도새는 신성으로부터 인위의 과정을 겪다 본연을 잃게 된다. 즉, 날 수 없게 되었다. 날 수 없게 된 도도새는, 스페인 사람들의 모리셔스 섬의 입도(入島)와 더불어 자취를 감추게 된다. 즉, 멸절된다.

 

화가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화가는 도도새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문명화 과정(civilizing process)’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문명화 과정’은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위대한 업적을 세운 독일의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 1897-1990)의 대표적 테제이다. 엘리아스는, 사람들의 행동 양식이 감정이나 폭력을 스스로 억제하여 문명화된 것으로의 변용을 가리켜, 예의라고 규정했다. 예의는 국가에 의한 물리적 폭력의 독점과도 같다. 이를 통해서 국가는 국내에 평온한 공간을 성립한다. 여기에 기초해서 사람과 사람의 상호의존 구조가 형성되었으며, 역사가 흐름에 따라, 더욱 상세해지고 복잡화된 관계 상태로 진화한다. 따라서 문명화 과정은 행동 양식의 세련화 과정이다. 세밀한 관계 설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적절한 심적 거리를 두게 한다. 이를 서구사회에서는 에티켓이나 커터시(courtesy)라고 부르며,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예악형정(禮樂刑政)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프레임이다. 즉, 격(格)자 안에 나의 사고와 상상,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을 가두어야 한다. 사유하는 날개를 스스로 무장해제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유하는 날개를 스스로 거두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

 

대략 두 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동심(童心)을 잃지 않는 법이다. 즉, 동심으로의 복귀가 발로 그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문명이라는 헛것[妄]에서 깸[覺]으로 나아가 진인(眞人)이나 신인(神人)에 이른다는, 장자(莊子,369-289B.C.)의 사유법을 배우는 방법이 있다. 화가는 전자를 다루고 있다. 우리는, 동심으로의 복귀가 명나라의 대사상가 이지(李贄, 1527-1602)의 논의에서, 절정을 이루었음을 기억한다. 문명화의 허구를 드러내기 위해서 화가는, 이지의 논의와 장자의 사유법 중 전자를 채택하고 있다.

 

나는 동심(童心)에서 우러나온 문장에는 진실로 감동한다.……하지만 이른바 육경(六經)이니 논어니 󰡔맹자니 하는 것 등은 도학자가 입으로만 나불대거나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며 거짓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모여드는 본거지일 따름이다. 따라서 육경과 논어와 맹자 속 글들이 동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육경(六經)은 동아시아 사회에서 최고의 경전이며 최상의 가치이다. 육경은 문명과 문화의 총체적 질서이다. 그러나 이지는 이 사실을 부정한다. 육경은 동심에서 벗어난 구실(口實)이거나 연폐(淵弊)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지의 말을 김선우 화가의 회화에 빗대면, 육경은 문명화의 최절정이며, 도도새의 날개를 거두는, 세련화라는 미명 아래 진행된 폭압이다. 동심은 반대로 잃어버린 날개이다. 따라서 동심의 회복은 잃어버린 날개의 회복이자 그것의 펼침이다. 당연히 동심과 날개는 신성(deity)과 그 뜻이 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지가 말하는 동심과 김선우 화가가 말하는 도도새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문명화 과정으로부터 잃었던 본연이다.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적 거리를 통해 잃었던 것이 있다. 원래의 인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완벽한 심적 일치(一致)가 있었다. 또한 사람과 자연 사이의 관계, 즉 천인지제(天人之際)에서의 완벽한 일체(一體)가 있었다. 태초에 사람은 자연으로부터 탈존(ex-ist)하지 않고 실존(in-sist)했다. 실존은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하나 됨(oneness)을 이루는 삶이다. 나아가 하나됨(oneness)은 전체(whole)와 뜻이 같으며 신성(holy)과도 어원이 같다. 사람의 ‘건강(health)’ 역시 고대 켈트어에서는 신성과 같은 어족이었다. 김선우의 회화는 진리(Aletheia, disambiguation)의 총체적 회복을 겨누고 있다.

 

둘째, 우리는 18세기 프랑스 학자 뷔퐁 백작(Georges-Louis Leclerc de Buffon, 1707-1788)이 “문체는 그 사람 자체이다.”라고 말한 명문을 음미해보아야 한다. 어떤 화가의 문체는 진정으로 그 사람 자체이다. 스스로 물려받은 것이며, 그 사람의 인격 자체이다. 이것은 배울 수도 없거니와 스스로 노력해서 채울 수도 없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글이 그 사람을 따른다는 뜻으로, 문류기인(文類其人)이라는 네 글자로 압축하여, 예술과 사람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당연히 글과 사람은 같다는 서류기인(書類其人)이나 그림과 그것을 그린 화가는 같다는 화류기인(畵類其人)이라는 말도 성립 가능하다.

 

김선우 화가는 사람 자체의 수준이 높다. 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타고난 소양 자체가 남과 다른 것이다. 화가는 아직 20대였던 시절에 문명의 답답함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사색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동부 연안으로부터 외떨어진 섬까지 찾아가며 생물학ㆍ인류학ㆍ사회학ㆍ미학ㆍ진화심리학의 연원에 대하여 고찰했으며, 장기간에 걸쳐서 축적된 방대한 동서양의 미술을 치밀하게 해석했다. 앞서 이지는, 가장 좋은 글은 동심을 잃지 않은 글이라고 했다. 그러한 글은,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쉬우면서도, 고도로 훈련된 지성인조차 탄복시킬 수 있는, 그러한 글이다. 그림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이 쉽게 볼 수 있으면서도,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마저 탄복시키는 그림이 최상급의 그림이다. 나는, 김선우 화가가 이러한 경계에 안착했다고 본다. 현재 화가는 도도새를 빌어서 거대담론을 진행하고 있다. 문명은 무엇이고, 인간은 어디로 가며, 자유는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묻고 있다. 화가의 자질과 성실성, 절실함, 정확성으로 볼 때, 그리고 자기 예술을 추진하는 추동력으로 볼 때, 화가는 앞으로 더욱 발전하여 인간의 감정과 같은 구체적 상황은 물론 시간, 변화, 물질, 정신 등 추상적 개념까지 작업에 풀어낼 것이라 보인다.

 

김선우 화가는 아직 기나긴 선로에서 출발점을 막 벗어났다. 나는 종착점이 될 즈음에 김선우 화가가 어떤 화가가 되어있을지 생각만 해도 즐겁다. 우리는 지금 큰 화가가 될 사람의 성장기를 보고 있는 시점에 서 있다. 우리는 화가를 독려하고 안아주며 함께 가야 한다. 그때에는 함께한 우리도 반드시 성장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선우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머릿속에 주역(周易)의 승괘(升卦)가 떠오른다.

 

승괘는 주역의 46번째 괘로서 ䷭로 표현된다. 아래는 손괘(巽卦)이며 위는 곤괘(坤卦)로 구성되어 있다. 승(升)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의미하는 승(昇)과 통용되는 문자로서 위로 올라간다는 뜻을 지닌다. 곤괘는 땅을 의미하며 손괘는 나무나 바람을 뜻한다. 땅과 바람, 나무와 같은 요소는 김선우 작가의 그림에서 모두 보이는 소재이다. 괘사로 돌아가보면 “승은 크게 형통하니 대인을 보되 근심하지 말고 남쪽으로 가면 길할 것이다.”고 하여 유순한 육오(六五)는 강건하면서도 중용의 덕을 갖춘 구이(九二)의 대인(大人)을 따라 이상향인 양명(陽明)한 남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승괘는 강한 상승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우 좋은 괘이지만, 동시에 잘못된 방향으로 올라갈 위험에 노출된다. 승괘에서 대부분의 효사가 길(吉), 이(利)등으로 평가되는데 반해, 구삼(九三)은 “빈읍으로 올라간다.”라고 말한 것은 자나치게 강한 성격으로 중용(中庸)의 덕을 상실함을 염려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말하는 대인이 능력 있는 한 사람을 특정해서 지칭하지 않는다고 본다. 작가를 양명한 남쪽으로 이끄는 힘은, 김선우 화가를 아끼는 모든 사람들의 심적 일치와 협력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화가의 작품을 함께 보는 우리는 행복한 시간 속에 서 있다.

 

 

PARADISE - 가능성의 바다

도도새를 알게 된 것은 인터넷에서 멸종된 동물들에 관한 글을 우연히 읽었을 때였다. 남아프리카 인근 인도양에 점처럼 떠 있는, 모리셔스라는 작고 아름다운 섬에 살던 그들은 원래 날 수 있는 새들이었지만 천적이 없는 평화로운 환경 속에서 더 이상 날아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고 결국 날기를 스스로 영원히 포기했다. 그런 상황에서 15세기 포르투갈 선원들이 이 낙원paradise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그들의 운명은 정해져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새임에도 불구하고 날지 못해 너무나도 쉽게 잡혀버리는 그들에게 조롱이라도 하듯 ‘도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도도’는 포르투갈어로 ‘바보’라는 뜻이다. 그리고 1681년, 마지막 남은 도도새가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유일하게 증명해주는 것은 모리셔스의 수도 포트루이스의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된 도도새의 뼈다귀들 뿐이다.
 
나는 이 비극이 현대인들에게 어떤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또한 도도새가 그랬던 것처럼 낙원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안주하는 동안 스스로 자유라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씩 뽑아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러한 고민을 바탕으로 지난 2015년, 예술가에게 여행 기회를 제공해 주는 <일현 트래블 그랜트> 프로젝트를 통해 도도새가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아프리카의 모리셔스 섬으로 한 달 간 떠나 도도새에 대하여 리서치를 진행한 뒤, 지금까지 도도새를 통해 꿈과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오고 있다.


나는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적인 사고방식을 제안한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언급했던 것으로, ‘떠도는 인간’이란 뜻이며, 인간은 방황 끝에 성장해 돌아온다는 것이다. 정주定住사회에서 방황 또는 일부러 길을 잃는 것은 일탈로 치부되곤 하지만, 오히려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수많은 길들 위에서 떠돌 때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길들과 가능성을 만날 수 있는 멋진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때문에 나의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도도새들은 ‘날지 못하는 바보 새’ 라기 보다는 다양한 방법으로 다시 비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알과 같은 존재들 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본 전시에서 이야기 하는 낙원paradise은, 어느 한 장소에 고정되어 있어 도달 할 수 있는 특정한 목표가 아닌, 끊임없이 표류하며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삶의 정점과 거기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를 뜻한다. 비록 세상에는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혼란과 역병이 만연하고 있지만, 가장 어두운 시간은 새벽을 예고하듯 이 어두운 시간들 속에서 찾아내는 나 자신만의 낙원이야말로 새벽빛을 불러오는 마중물이 되리라 믿는다. 

"삶에는 그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어떤 정점을 나타내는 환희가 있다. 그런 것이 살아 있음의 역설이다.

그 환희는 살아 있기에 찾아오지만 살아 있음을 완전히 망각할 때에야 찾아온다.

그 환희, 살아 있음의 망각은 감흥의 불꽃 속에서 자아를 잊는 예술가에게 찾아온다."
잭 런던, <야성의 부름> 中

 


2022. 1. 27. THU – 2022. 2. 27. SUN
GANA ART CENTER
서울시 종로구 평창30길 28
1, 2 전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