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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문화공간 제주 김선우 개인전

《 사이의 안부 ; A Note Left in the In-Between 》


🍊2025. 10. 23 - 12. 14
🍊서보미술문화공간 제주 (제주 제주시 한경면 저지14길 23-4)
🍊10:00 - 18:00 (입장 마감 17:00, 월요일 휴관)

바이닐 레코드(LP)를 모으기 시작한 지 어느덧 일 년이 되었습니다. 사실, 요즘은 이런 수고를 들이는 일이 사치처럼 여겨질 만큼 음악을 듣는 일이 무척 쉬워졌습니다. 알고리즘은 내 취향을 나보다 먼저 예측하고, 손끝 몇 번이면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저는 종종 그 편리함에서 아쉬움을 느낍니다. 쉽게 얻는 것들은 대개 쉽게 사라져 버리고 마니까요.

요즈음은 취향조차 유행을 따라 빠르게 변하고, 감상이라는 감각적인 행위조차 알고리즘이라는 효율의 영역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감정마저 데이터화 되고, 시간은 ‘추천 항목’으로 환원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레코드를 모으는 일은 거기에 대한 저의 작은 저항입니다. 음악을 ‘듣는’ 시간을 회복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시간을 통해 세상과 나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되찾기 위해서요. 좋아했던 뮤지션의 음반,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앨범을 직접 고르고, 공들여 주문한 뒤, 마침내 턴테이블에 얹는 그 순간은 오래도록 숙고한 고백을 건네는 그것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그날의 하루를 마무리하는데 어울리는 레코드를 골라 턴테이블에 올리는 순간이 늘 기다려집니다. 이 느린 감상의 시간은 저와 이 세계 사이의 숨 쉴 틈을 조율하는 방식이자 하루를 마치는 나만의 의식입니다.

 

갑자기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이지만, 그런 나날을 보내던 중 알게 된 것이 ’수관기피‘라는 단어입니다. 당연히 음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 무슨 사연인가 하면, 평소에 관심있던 어쿠스틱 기타리스트 무네키 타카사카(高坂宗輝)의 ’파니욜로Paniyolo‘ 연주곡이 수록된 음반을 찾다가 발견한 온라인 레코드샵의 이름이 《수관기피》였던 것입니다. 처음 듣는 단어였기에 찾아봤는데, 그 뜻이 썩 인상 깊었습니다. ‘수관기피’란 나무들이 자랄 때 서로의 수관을 침범하지 않고 자라는 현상이라고 해요. 수관樹冠은 나무의 윗부분을 뜻합니다. 이 현상 덕분에 나무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랄 수 있고, 수관들의 틈새로 내려오는 햇볕 덕분에 그 아래의 식물들 또한 함께 공생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무네키의 음반 소개 글에는 "소리와 소리 사이를 소중히 하면서 연주하고 있습니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수관기피의 뜻을 알고 다시 보니 이 음반을 판매하는 레코드샵 《수관기피》와 절묘하게 잘 어울리는 조합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연주를 듣던 어느 날 밤, 문득 올해 10월 제주에서 열릴 개인전을 떠올렸습니다. 서울에서는 여러 번 전시를 열었지만, 제주에서의 단독 전시는 처음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제의 작업을 준비해야 하나 무척 고심하던 차였습니다.

저는 십일 년째 멸종된 새 ‘도도새’를 그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매번의 전시회를 할 때마다 도도새가 등장하기에, ‘뭐가 됐던 어쨌든 도도새를 그리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질문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전시가 열리게 될 장소와, 전시를 준비하며 천착했던 생각과 고민들을 고려해 그 내용이나 주제가 조금씩 변화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예술가는 스스로에게 익숙한 방식 속에서 새로운 변주를 찾고, 조금씩 성장하는 기쁨을 맛보는 것입니다.

 

저는 제주의 숲을 좋아합니다. 제게 육지의 숲과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아련하고 애틋한 감정과 그리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오래전 어린 시절 기억 속 애착했던 장소에 도달한 것만 같은 착각을 들게 합니다. 어쩌면 바다를 건너 육지에서 건너온 이방인이 느끼는 이채異彩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섬이라는 특수한 장소가 품을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고독으로부터의 따뜻한 슬픔의 전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일 년에 적어도 한번은 제주로 내려가 숲과 바다가 가까운 곳에서 삼에서 사일 정도를 머물곤 합니다. 분주한 일상으로 탈진한 몸과 마음을 돌보기 위해서요. 본래의 일상으로부터 너무 멀어지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에서 일상에 무리가 가지 않을 만큼의 기간 동안 머물며 그간 좀처럼 돌보지 못했던 삶의 균형을 되찾는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마치 제가 매일 밤마다 레코드를 들으며 세상과의 짧은 ‘거리두기’를 하듯, 요컨대 제주는 제게 있어 ‘수관기피’의 장소인 것입니다.

 

제주라는 나만의 ‘거리두기’의 공간, 그리고 레코드샵 《수관기피》에서 보내온 무네키의 음악은 제주에서 예정된 전시에 대한 단서를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제가 십일 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그려온 도도새는 이미 멸종한 지 300년이나 된 새입니다. 날 수 있었지만, 안락한 환경 속에서 날기를 포기했고, 그로 인해 멸종의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저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두고 생각했습니다. 도도새가 그랬듯 우리 또한 편리와 안락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 사고하고 선택하는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요. 편리함과 효율성의 대명사인 알고리즘은 어느새 인가부터 우리 삶의 이정표처럼 작동하게 되었고, 그러한 세태 속에서 이제 우리는 스스로 자신만의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데에 오히려 점점 더 두려움과 주저함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도도새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날기를 멈췄듯, 우리 또한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자신만의 기준과 자유를 포기하는 동안 우리 삶 속 ‘수관들’ 사이의 여백이 점점 좁아져만 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수관기피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도도새가 외부 환경에 과도하게 순응한 결과 멸종에 이르렀다면, 수관기피는 자기 주체성을 지키며 세상와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생존을 이어가는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세상이 끊임없이 ‘기준’과 ‘정답’을 강요할 때, 우리는 오히려 각자의 고유한 영역을 인식하고, 삶에 적절한 여백을 허락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제주에서 열릴 이번 전시가 수관기피의 틈 사이로 스며드는 연한 빛무리와 같은 기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품을 준비했습니다. 나무들이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음으로써 만들어낸 그 무해한 빛처럼, 소리와 소리 사이를 소중히 하며 음반을 만들었다는 무네키의 말처럼, 세상과 당신의 사이, 당신과 세상의 사이가 조금 더 소중하며 안온한 관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김선우

그가 많은 사람들을 편안히 미소 짓게 하였다

이병률 (시인. 여행작가)

 

다시 태어난다면 새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새로 태어난다면 김선우 작가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김선우 작가의 그림은 그 자체로 착한 세상이기도 하고 그래서 어쩌면 천국일 것이고, 또 어쩌면 인류가 발생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자연 뿐인 세상 속이니까요.

착한 사람 김선우 작가를 알았습니다. 그의 그림은 마치 여행 같습니다. 낯선 곳을 찾아가는 여행인 듯싶기도 하면서,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데도 사람을 기다리거나 찾아가는 여행만 같습니다.

어쩌면 그의 그림은 이토록 착할까요. 그가 꿈이라는 거대한 거울을 실타래처럼 풀어내고 있어서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착한 사람들은 꿈속에서 결코 자기가 ‘악역’을 맡지 않는다고 합니다. 깨어나서는 아주아주 힘들 만큼 악몽을 꾸고 일어나서 보면 쫓기는 입장이거나 남한테 고통을 받는 힘겨운 입장일 뿐 절대 가해자가 되지는 않는답니다. 꿈은 무의식의 표현이라고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속에서 착하고 선하지, 악역을 맡게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선우 작가의 그림들 앞에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김선우 작가는 이 지구의 창문에다 우리가 잊고 사는 꿈을 그리면서 착한 사람의 역할을 맡고 있어서입니다.

말하나마나 착함은 평화의 다른 이름일 것이고 그 평화로움은 우리를 판타지로 견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난 믿음이라는 게 좋은 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의 치료를 위해 공간을 바꿉니다. 조금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매일 다니는 길을 바꾸는 것처럼 말입니다.

숨이 막힐 것 같을 땐 창을 열고 밖을 오래 바라봅니다. 비가 왔음 좋겠다고 생각하거나, 눈이 왔음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 만났던 사람 곁을 불쑥 떠나기도 하고 또 누군가를 간절히 새로 만나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김선우 작가의 그림 앞에서 문득 이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혼자 살고 있는 시각장애인은 어느 날,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벽에다 그림 하나를 걸고 싶다고 말합니다. 오래 전부터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멋있는 그림 한 점을 집에다 거는 거였다고 말하면서요.

그래서 친구는 앞을 못 보는 친구가 그림을 구하러 외출할 때 동반해줬습니다.

갤러리에서 친구는 그림들을 설명합니다. 앞을 못 보는 친구는 친구의 말을 유심히 듣습니다.

결국은 평화로운 그림 한 점을 고르게 됩니다.

그러고는 시각장애인 친구 집에 간 다음 그림 걸 자리에 못을 박고 그림을 걸면서 친구는 궁금했지만 참고 있었던 걸 물어봅니다.

“근데, 솔직히… 이 그림은 왜 거는 건데?”

그러자 앞을 못 보는 친구는 말하죠.

“그래도 그게 벽에 걸려 있으면 그쪽 벽을 바라보는 일은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림을 볼 순 없지만, 그곳에 그게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나아질 겁니다.

어쩌면 그 그림을 보기 위해 차를 끓여서, 그림 앞에 앉은 다음 이내 행복하단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 끝에다 김선우 작가의 그림을 붙여보면 어떨지요. 앞으로 못 보는 사람이 집에 걸고 싶은 그림 한 점이 김선우 작가의 그림이라면 어떨지 말입니다. 푸르고 투명합니다. 넓은 잎새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립니다. 정적이지만 충분히 수런거립니다. 도도새들이 저희들끼리 진심을 다해 과거를 응시하면서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황금빛 열매들이 달빛을 받아 새초롬히 빛나는 숲의 시간은 마침 섬을 따라 맴도는 밤바다의 노래만 같습니다.

 

거기에, 그 자리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사실 없다하더라도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그게 정말 원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만큼의 믿음이라면 우리 삶에 굉장한 차이와 변화를 가져다 줄 거거든요. 그건 김선우 작가의 그림 앞에서 우리가 꾸던 꿈을 마저 완성하는 희망으로 이어질 겁니다.

 

모두가 다 가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것,

모두가 다 빗물에 씻겨도, 씻기지 않는 마지막까지 유일한 것,

모두가 나에게 아니라고 말할 때 조용히 내 어깨에 올려주던 따뜻한 손,

그리고 세상 끝나는 날이 와도 분명히 그리워하게 될 그 존재들의 메시지,

우리들 빈 액자 속엔 그런 그림을 그리는 친구가 한 명 있답니다.

 

모든 인간의 공통된 꿈은 지구가 훤히 내려다보이도록 높이 높이 날아오르는 것이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도 필요할 것이고 또 지금의 속도라면 앞으로 몇 천 년이라는 시간도 무심히 흐를 것이겠지요. 그 몇 천 년이 지난 어느 시점, 어느 기록에는 이렇게 적히기를 희망합니다.

이 우주에는 ‘지구’라는 별이 있었고, 그 지구에는 마음씨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그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가닿고 싶어 했고, 달려가서 흠뻑 안기고자 했던 풍성한 숲을, 그림으로 그려서, 많은 사람들을 편안히 미소 짓게 하였다, 라는 기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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